한 편의 시를 위한 시 창작


양안다

시인


1992년 충남 천안 출생.
201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작은 미래의 책』『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세계의 끝에서 우리는』『숲의 소실점을 향해』『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몽상과 거울』.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창작 동인 ‘뿔’로 활동 중. 

 



2강 순서대로 읽는다 순서대로 쓰지 않더라도

7ed9eacb9011f.png


4. 순서대로 읽는다 순서대로 쓰지 않더라도

시를 읽을 때는 순서가 존재한다. 제목을 읽고, 첫 줄을 읽고, 그다음 줄을 읽고, 그리고 그다음 줄을 읽고…… 그렇게 마지막 줄까지 순서대로 읽게 된다. 시집을 읽을 때에는 순서를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 24페이지의 시를 읽고, 58페이지의 시를 읽고, 19페이지의 시를 읽어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편의 시를 읽을 때에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 그 누구도 4연 1행을 먼저 읽고, 8연 5행을 읽은 다음에 마지막 줄을 읽고 그다음에서야 제목을 읽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음악을 듣는 것과 비슷하다. 하나의 곡을 들을 때 우리는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그대로 듣는다. 2분 32초 부분을 들었다가 1분 12초를 들은 다음엠 2분 9초를 듣지 않는 것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회화를 감상하는 것과 다르다. 하나의 회화 작품을 감상할 때 책처럼 왼쪽 위에서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그다음 아랫부분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상하지 않아도 된다. 눈길 닿는 곳마다 자유롭게 회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열 명의 사람이 하나의 회화 작품을 감상한다면 열 가지의 감상 방식이 생길 것이다.

독자가 시를 어떻게 감상할지 예상할 수 없지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점은 순서대로 읽는다는 사실이다. 시가 완성되는 것은 문장 순서가 아니다. 시를 쓰다 보면 중간에 위치했던 문장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하고, 마지막 문장이었던 것이 첫 문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독자는 이러한 과정을 모른 채 완성된 시를 읽게 된다.

일상에서 우리는 같은 말을 다른 곳에서 들을 때가 있다. 같은 인사를 다른 날에 다른 사람과 다른 공간에서 나누게 되면, 그 인사는 전에 했던 인사와 맥락이 달라진다. 같은 말이더라도 상황에 따라 정서가 달라진다. 시의 문장도 마찬가지다. A라는 문장을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그 문장의 힘이 결정된다. A라는 문장을 읽기 전에 독자는 무엇을 읽었는가. 독자에게 무엇을 읽고 A라는 문장을 읽게 해야 힘이 생기는가.

우리는 가끔 이 사실을 잊는다. 시인은 본인이 쓴 시이기에 그 자체가 완성이라고 느낀다. 독자는 그렇지 않다. 독자가 쓴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시인이 의도한 순서대로 문장들을 읽어나갈 뿐이다.

어느 공사 현장이 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곳을 지나며 공사 현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파트 단지를 짓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진행 속도가 더디게 느껴졌다. 어떤 건물은 순식간에 지어진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참 남은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 순간 건물이 다 지어진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대다수의 건물을 이용한다. 건물에 거주하기도 하고, 건물을 방문하기도 하고, 건물에 드나들기도 한다. 우리는 그 건물이 어떻게 지어지는지 알지 못한 채 이용한다. 물론 건축 과정을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독자도 마찬가지다. 독자는 시인이 시를 어떤 과정을 거쳐 썼는지 알지 못하며, 알 필요도 없다. 독자는 완성된 시만 볼 뿐이다.

그러나 시와 건축의 차이가 있다면 독자가 알지 못하는 그 건축 과정에 있다. 건물은 사람이 이용하기에 안전성을 보장해야 하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 원한다면 우리는 건물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지만 시는 문장 순서대로 읽는다. 시든 건물이든, 만드는 사람과 그것을 이용하는(읽는)사람의 입장이 다른 것이다.

쓰는 사람은 동시에 읽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둘의 입장을 종종 동일하다고 여긴다. 두 입장의 차이에 대해 고민해본다면 같은 문장이 다른 곳에 등장할 수 있으며, 그때 문장은 더 힘을 얻을 수 있다. 내가 고민하는 것은 “이 문장은 어떤 문장 뒤에 있는 게 좋을까”보다 “어디까지 읽었을 때 이 문장을 읽게 하는 것이 좋을까”에 더 가깝다.

 

81a5877b19f01.jpg

사진: Unsplash의Diomari Madulara   



5. 시는 인간의 일

나는 시를 정신적인 것이라거나 종교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시는 물질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영화나 회화를 물질적인 것이라 말하면 납득할 수 있지만, 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술과 마법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아마도 트릭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마술을 볼 때 그것이 인간이 행한 일이며, 따라서 분명히 트릭이 존재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마법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이며,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이다.

시는 마법이 아니라 마술에 가깝다. 그러나 시에 대한 환상은 우리의 두 눈을 가려서 종종 마법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시는 기술이라는 이름의 트릭이 존재하는 마술이다. 창작자의 의도에 따라 텍스트를 섬세하게 배치하거나 느슨하게 엮음으로써 마술과 같은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시를 쓴 창작자, 즉 인간이 행한 일이다.

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상님이 꿈에 나타나 읊어주는 것이 아니다. 원한다면 그런 체를 할 수는 있다. 시를 써본 사람이라면 한 편의 시를 쓰기까지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물론 시를 쓸 때 ‘영감’이 찾아올 때가 있다. 갑작스럽게 번뜩이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을 운 좋게 발견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발생한다. 개인적으로 영감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나는 그것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감’이라는 것이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가 원할 때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원하지 않는 자에게 ‘영감’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감’은 복권과 같다. 복권에 당첨되려면 적어도 복권을 구매해야 한다. 당연히 복권을 구매하는 모든 이들이 당첨되는 것은 아니다. 낙첨되는 수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중요한 건 복권을 구매하지 않고 당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영감’도 마찬가지다. 시에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시의 영감’이 떠오를 리가 없다. 시를 쓰는 사람은 작은 행운도 ‘영감’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고, 그렇지 않다면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망치를 쥐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말처럼 우리는 작은 우연조차도 ‘시의 영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한다.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우연은 우연으로 그친다. 그러니 ‘영감’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인간의 일이다.

시를 물질적인 것이라 말하면 간혹 신성모독을 당한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시가 누군가의 신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기도를 드려도 신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듣지 못한다는 점에서 시와 신은 비슷할 수 있으니까. 나에게 있어서 시는 기도하는 행위가 아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잉여물 같은 것이다. 잘 먹고 잘 살고 잘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물질적이다. 시는 그 수평선에 함께 있다.

 


6. 문장 흐름 지켜보기

문장과 문장, 그리고 또 다른 문장이 모이고 모여 시가 완성된다. 누군가는 장식적인 문장을 선호할 것이고 누군가는 건조한 문장을 선호할 것이다. 누군가는 긴 문장을 선호할 것이고 누군가는 짧은 문장을 선호할 것이다. 어느 문장을 선호하느냐는 개인 취향에 달린 일이다. 읽는 사람에게도 쓰는 사람에게도 취향에 따라 갈리는 일이다.

쓰는 사람은 문장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 결국 시를 이루는 것은 문장이니까. 미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단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문장에 따라 효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문장으로 시를 구성할 것이냐는 우리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장식적인 문장으로 발생하는 효과는 건조한 문장도 할 수 있고, 긴 문장으로 발생하는 효과는 짧은 문장도 할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는 문장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문장의 배치와 흐름으로 시가 완성된다. 그렇기에 하나의 문장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 문장을 운용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더 유효하다. 하나의 문장에서 다음 문장까지 얼마나 거리감을 줄 것인가. 다음 문장으로 부드럽게 이을 것인가냐, 거칠게 이을 것인가. 얼마만큼의 낙차를 줄 것인가. 얼마나 다양한 층위의 목소리를 사용할 것인가.

문장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고 싶은 건 당연한 욕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개성적인 문장은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여러 문장의 흐름에서 나온다. 문장의 흐름을 생각하다 보면 화자의 역할도 달라질 수 있다. 물론 하나의 문장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다. 문장을 잘 쓰는 것은 시간의 문제다. 쓰면 쓸수록 문장력은 늘게 되어 있다. 문장의 흐름은 그렇지 않다. 고민해보고 직접 시도해봐야 그 거리감을 인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