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시 쓰지 않고 시 쓰기
한 편의 시는 어떻게 완성되는 걸까? 분명 시를 쓰는 동안 여러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막상 완성하고 나면 무슨 생각을 하며 시를 썼는지 잊게 된다. 자신이 시를 쓰는 방식을 모두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언젠가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 인간이 시를 쓸 때 일어나는 과정을 기록했으면 좋겠다. 신체 변화라거나 심박수라거나 호르몬 분비, 뇌의 반응 같은 것.
나는 시를 쓸 때 ‘그냥’ 쓴다. 물론 이 말의 함의가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시를 ‘그냥’ 쓰기 위해 평소에 훈련을 한다. 시를 쓰는 시간보다 시를 쓰지 않는 시간에 시를 위한 노력을 하는 셈이다. 시를 쓰지 않는 시간, 그러니까 일상을 보내며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들었는지, 그리고 누구를 만났다거나 어떤 일을 겪었는지가 시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독서, 음악 및 영화 감상 등과 같은 활동도 포함되지만, 넓게 보면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느 사람을 만났으며, 무슨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 등등 인간의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맡고, 먹는다. 동시에 우리는 이 행위에 대한 반응과 감각을 얻는다. 일일이 인지하지 않더라도 이 감각들은 퇴적층처럼 쌓인다. 그리고 시를 쓸 때 자연스럽게 작동할 것이다.
현재의 순간이 미래의 시를 결정한다. 시를 쓰지 않는 순간에도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렇다. 현재의 선택이 미래의 결과를 바꾸듯이. 볼링공을 던질 때 미세한 각도의 차이가 다른 점수를 만들 듯이.
만약 기술이 발전된다면, 그래서 인간의 시 창작 과정을 기록할 수 있는 기계가 생긴다면, 아마 시 쓰는 사람은 그 기계를 매일 착용하고 다녀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 시의 창작 과정을 온전히 복기할 수 있을 것이다.
2. 시나 쓰고 다니고
왜 하필 시를 쓰는 걸까. 블로그나 SNS, 아니면 인터넷 어딘가에 자신의 글을 올릴 수도 있을 텐데 왜 하필 시여야 할까. 그리고 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걸까.
나는 여기에 어떤 인정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싶은 것. 그리고 그 방식으로 인정을 받고 싶은 것. 그렇지 않다면 시는 혼자 써도 된다. 혼자 쓰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아도 될 테니까.
어느 날, 나는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슬픔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슬프다”라고 적었다. 어느 날, A도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A도 그 슬픔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슬프다”라고 적었다. 결과적으로 나와 A는 동일하게 “슬프다”라고 적게 되었다.
나와 A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분명 둘의 슬픔도 다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텍스트로 옮겼을 때는 동일하게 “슬프다”로 표현되었다. 나와 A는 다른 층위의 슬픔이지만, 독자가 읽게 될 것은 “슬프다”라는 동일한 세 글자다. 현대시가 어려운 이유를 찾자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창작자는 텍스트를 조합하고 해체한다.

사진: Unsplash의Aarón Blanco Tejedor
감정뿐만 아니라 주제, 장면 등 자신만의 의도를 표현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읽는 이에게 가닿아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는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다. ‘자신’의 의도를 ‘타인’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연한 말이다. 나는 네가 아니니까. 너도 내가 아니니까. 우리는 나의 모든 의도를 전달할 수 없다는 슬픈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물며 대화를 통해서도 나의 의도를 온전히 전달할 수가 없는데 그것을 시로 전달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니까.
의도를 전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의도를 전달하기를 포기해야 할까? 물론 아니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는 사실이다. 나의 감각과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생각만큼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남들과 내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뜯어 보면 타인에게서 나의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심리테스트나 성격유형검사만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치화할 수 없겠지만 이를테면 이렇다. 우리는 90%가 비슷한 면을 공유하고 있다. 10% 정도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10%가 나와 너의 분명한 차이점을 만든다. 생각해보면 10%는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니까. 시를 쓰는 것, 그리고 나의 의도를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은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달라는 하나의 인정욕구다.
가끔은 이러한 인정욕구가 창작자를 좀먹는다. 우리의 기대보다 현실은 냉정하다. 나는 시를 쓰다 자신의 기대와 다른 현실에 무너지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시를 통해 당장의 목표를 이룬다면 매우 행복하겠지만, 그 이후까지 꿈꾸는 게 우리의 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현실이 냉정한 게 아니라 우리의 기대가 너무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아름다운 기대 속에서 시를 쓴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은 냉정하고 나는 자주 슬픔에 빠진다.
그럼에도 시를 쓴다. 왜? 시를 쓰고 싶으니까. 블로그나 SNS에 글을 올리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나는 시를 쓰고 싶으니까.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 시를 쓰고 싶다면 시를 쓰면 된다. 슬픔은 이해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존재가 아니다. 곁에 두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조금씩, 느리더라도 아주 조금씩 작은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나처럼 대단하지 않은 시인이 이런 글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뭐라고 시에 대해서 떠들 수 있나. 그러나 이 글을 읽고 나서 단 한 명이라도 재미있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아름다운 기대를 가져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나의 일이다. 시를 쓰는 우리의 일이다. 그거면 됐다.
3. 있는 그대로
마음 편하게 쓰기 쉬운 글 중 하나는 일기다. 일기를 쓰게 되면 다른 글을 쓸 때보다 편하게 문장과 생각들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는 일기를 써본 경험이 있고, 그것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일기를 쓸 줄 안다. 타인이 읽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일기 쓰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일기의 유일한 독자는 오직 나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기를 쓸 때와 시를 쓸 때 문장이나 표현 방식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시는 일기와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시는 언어예술이다. 예술작품을 창작할 때 고민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창작할 때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고민하는 법이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시에 대한 본인만의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시는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거나 혹은 그 반대라거나, 아니면 시적인 문장이 있어야 한다거나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거나 등 개인마다 “내가 생각하는 시의 정의”, 즉 시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시를 쓰는 데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이 감응했던 의도는 고정관념을 통과하며 다른 것으로 변모한다. 의도는 고정관념이라는 옷을 입고 본인의 몸을 숨긴다. 분명 내가 감응하고 재미있다고 느낀 의도가 있는데 시로 옮기고 나면 생각보다 시시해지는 것이다. 결국 ‘좋은 의도’일 수 있었던 것은 어느새 몸을 숨기고 보이지 않게 된다.
나는 합평을 하다가 간혹 물어볼 때가 있다. “이 시는 어떤 생각으로 쓰셨나요?” 그럼 그 사람은 자신의 시를 어떻게 썼는지 말할 것이다. 그 시의 시작점과 중간 과정, 표현하고 싶었던 의도나 고민되었던 지점 등등. 듣고 나서 내가 자주 하는 말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다. “지금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시에 써보세요.”
시의 시작을 촉발했던 지점은 대체로 날것이지만 재미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시로 옮기면서 날것을 보기 좋게 다듬는다. 다듬는 중에 재미있는 부분도 함께 깎여 나간다. “보기 좋게 다듬는다”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내가 보기 좋게 다듬는” 행위에 가깝다. 타인이 보기에는 아닐 수 있다. 그렇게 다듬고 다듬다 보면 시에는 시작과 다른 것이 존재하게 된다. 나의 시를 고정관념이라는 테두리 안에 넣기 위해 다듬는 것이다. 인간은 쉽게 고정관념을 버릴 수 없다. 다만 테두리를 의식하며 그 면적을 넓혀볼 수는 있다. 다듬지 않더라도 테두리 안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외연을 넓혀보자.
무언가를 다듬더라도 우리는 시의 시작을 촉발했던 지점을 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빛처럼 시를 환하게 보이도록 만들지만, 시간이 지나 밤이 오면 빛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1. 시 쓰지 않고 시 쓰기
한 편의 시는 어떻게 완성되는 걸까? 분명 시를 쓰는 동안 여러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막상 완성하고 나면 무슨 생각을 하며 시를 썼는지 잊게 된다. 자신이 시를 쓰는 방식을 모두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언젠가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 인간이 시를 쓸 때 일어나는 과정을 기록했으면 좋겠다. 신체 변화라거나 심박수라거나 호르몬 분비, 뇌의 반응 같은 것.
나는 시를 쓸 때 ‘그냥’ 쓴다. 물론 이 말의 함의가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시를 ‘그냥’ 쓰기 위해 평소에 훈련을 한다. 시를 쓰는 시간보다 시를 쓰지 않는 시간에 시를 위한 노력을 하는 셈이다. 시를 쓰지 않는 시간, 그러니까 일상을 보내며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들었는지, 그리고 누구를 만났다거나 어떤 일을 겪었는지가 시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독서, 음악 및 영화 감상 등과 같은 활동도 포함되지만, 넓게 보면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느 사람을 만났으며, 무슨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 등등 인간의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맡고, 먹는다. 동시에 우리는 이 행위에 대한 반응과 감각을 얻는다. 일일이 인지하지 않더라도 이 감각들은 퇴적층처럼 쌓인다. 그리고 시를 쓸 때 자연스럽게 작동할 것이다.
현재의 순간이 미래의 시를 결정한다. 시를 쓰지 않는 순간에도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렇다. 현재의 선택이 미래의 결과를 바꾸듯이. 볼링공을 던질 때 미세한 각도의 차이가 다른 점수를 만들 듯이.
만약 기술이 발전된다면, 그래서 인간의 시 창작 과정을 기록할 수 있는 기계가 생긴다면, 아마 시 쓰는 사람은 그 기계를 매일 착용하고 다녀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 시의 창작 과정을 온전히 복기할 수 있을 것이다.
2. 시나 쓰고 다니고
왜 하필 시를 쓰는 걸까. 블로그나 SNS, 아니면 인터넷 어딘가에 자신의 글을 올릴 수도 있을 텐데 왜 하필 시여야 할까. 그리고 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걸까.
나는 여기에 어떤 인정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싶은 것. 그리고 그 방식으로 인정을 받고 싶은 것. 그렇지 않다면 시는 혼자 써도 된다. 혼자 쓰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아도 될 테니까.
어느 날, 나는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슬픔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슬프다”라고 적었다. 어느 날, A도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A도 그 슬픔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슬프다”라고 적었다. 결과적으로 나와 A는 동일하게 “슬프다”라고 적게 되었다.
나와 A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분명 둘의 슬픔도 다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텍스트로 옮겼을 때는 동일하게 “슬프다”로 표현되었다. 나와 A는 다른 층위의 슬픔이지만, 독자가 읽게 될 것은 “슬프다”라는 동일한 세 글자다. 현대시가 어려운 이유를 찾자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창작자는 텍스트를 조합하고 해체한다.
사진: Unsplash의Aarón Blanco Tejedor
감정뿐만 아니라 주제, 장면 등 자신만의 의도를 표현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읽는 이에게 가닿아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는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다. ‘자신’의 의도를 ‘타인’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연한 말이다. 나는 네가 아니니까. 너도 내가 아니니까. 우리는 나의 모든 의도를 전달할 수 없다는 슬픈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물며 대화를 통해서도 나의 의도를 온전히 전달할 수가 없는데 그것을 시로 전달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니까.
의도를 전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의도를 전달하기를 포기해야 할까? 물론 아니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는 사실이다. 나의 감각과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생각만큼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남들과 내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뜯어 보면 타인에게서 나의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심리테스트나 성격유형검사만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치화할 수 없겠지만 이를테면 이렇다. 우리는 90%가 비슷한 면을 공유하고 있다. 10% 정도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10%가 나와 너의 분명한 차이점을 만든다. 생각해보면 10%는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니까. 시를 쓰는 것, 그리고 나의 의도를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은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달라는 하나의 인정욕구다.
가끔은 이러한 인정욕구가 창작자를 좀먹는다. 우리의 기대보다 현실은 냉정하다. 나는 시를 쓰다 자신의 기대와 다른 현실에 무너지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시를 통해 당장의 목표를 이룬다면 매우 행복하겠지만, 그 이후까지 꿈꾸는 게 우리의 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현실이 냉정한 게 아니라 우리의 기대가 너무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아름다운 기대 속에서 시를 쓴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은 냉정하고 나는 자주 슬픔에 빠진다.
그럼에도 시를 쓴다. 왜? 시를 쓰고 싶으니까. 블로그나 SNS에 글을 올리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나는 시를 쓰고 싶으니까.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 시를 쓰고 싶다면 시를 쓰면 된다. 슬픔은 이해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존재가 아니다. 곁에 두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조금씩, 느리더라도 아주 조금씩 작은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나처럼 대단하지 않은 시인이 이런 글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뭐라고 시에 대해서 떠들 수 있나. 그러나 이 글을 읽고 나서 단 한 명이라도 재미있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아름다운 기대를 가져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나의 일이다. 시를 쓰는 우리의 일이다. 그거면 됐다.
3. 있는 그대로
마음 편하게 쓰기 쉬운 글 중 하나는 일기다. 일기를 쓰게 되면 다른 글을 쓸 때보다 편하게 문장과 생각들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는 일기를 써본 경험이 있고, 그것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일기를 쓸 줄 안다. 타인이 읽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일기 쓰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일기의 유일한 독자는 오직 나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기를 쓸 때와 시를 쓸 때 문장이나 표현 방식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시는 일기와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시는 언어예술이다. 예술작품을 창작할 때 고민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창작할 때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고민하는 법이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시에 대한 본인만의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시는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거나 혹은 그 반대라거나, 아니면 시적인 문장이 있어야 한다거나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거나 등 개인마다 “내가 생각하는 시의 정의”, 즉 시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시를 쓰는 데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이 감응했던 의도는 고정관념을 통과하며 다른 것으로 변모한다. 의도는 고정관념이라는 옷을 입고 본인의 몸을 숨긴다. 분명 내가 감응하고 재미있다고 느낀 의도가 있는데 시로 옮기고 나면 생각보다 시시해지는 것이다. 결국 ‘좋은 의도’일 수 있었던 것은 어느새 몸을 숨기고 보이지 않게 된다.
나는 합평을 하다가 간혹 물어볼 때가 있다. “이 시는 어떤 생각으로 쓰셨나요?” 그럼 그 사람은 자신의 시를 어떻게 썼는지 말할 것이다. 그 시의 시작점과 중간 과정, 표현하고 싶었던 의도나 고민되었던 지점 등등. 듣고 나서 내가 자주 하는 말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다. “지금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시에 써보세요.”
시의 시작을 촉발했던 지점은 대체로 날것이지만 재미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시로 옮기면서 날것을 보기 좋게 다듬는다. 다듬는 중에 재미있는 부분도 함께 깎여 나간다. “보기 좋게 다듬는다”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내가 보기 좋게 다듬는” 행위에 가깝다. 타인이 보기에는 아닐 수 있다. 그렇게 다듬고 다듬다 보면 시에는 시작과 다른 것이 존재하게 된다. 나의 시를 고정관념이라는 테두리 안에 넣기 위해 다듬는 것이다. 인간은 쉽게 고정관념을 버릴 수 없다. 다만 테두리를 의식하며 그 면적을 넓혀볼 수는 있다. 다듬지 않더라도 테두리 안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외연을 넓혀보자.
무언가를 다듬더라도 우리는 시의 시작을 촉발했던 지점을 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빛처럼 시를 환하게 보이도록 만들지만, 시간이 지나 밤이 오면 빛은 사라지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