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를 위한 시 창작


양안다

시인


1992년 충남 천안 출생.
201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작은 미래의 책』『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세계의 끝에서 우리는』『숲의 소실점을 향해』『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몽상과 거울』.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창작 동인 ‘뿔’로 활동 중. 

 



3강 테세우스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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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테세우스의 시

시를 쓰는 사람들은 시에 대해 생각하기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시인에 대해서는 그만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시를 대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시를 대하는 마음에 따라 그 사람의 시가 재정의될 수 있으며 동시에 시의 스타일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A에게 옷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패션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의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A와 내가 옷을 대하는 마음은 현저하게 다를 것이다. A에게 새벽은 외로운 시간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즐거움과 휴식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A와 내가 새벽을 대하는 마음은 현저하게 다를 것이다. A에게 책은 재미없는 사물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아니다. 그러므로 A와 내가 책을 대하는 마음은 현저하게 다를 것이다.

하나의 대상을 대하는 마음은 그 대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나는 시를 하나의 놀이라고 여기며, 동시에 일상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청소를 하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게임을 하고…… 이와 같은 일상의 행위 중 시가 속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시를 통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주려 하지 않는다. 나는 밥을 먹는 사람이나 영화를 보는 사람,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줘야 한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시를 통해 돈 벌 생각이 없다. 나는 잠을 자거나 놀이를 통해 돈을 버는 게 어렵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시를 대하는 마음이 다를 것이다. 이 차이가 그 시인과 시인의 시를 재정의할 수 있다. 이것에 있어서 정답은 없다. 그저 자신만의 정답이 존재할 뿐이고,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상황이 맞물려 언제든지 자신만의 정답이 바뀔 수 있을 뿐이다.

테세우스의 배라는 용어가 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배가 있다. 시간이 지나 배의 판자가 낡아서 그 판자를 떼어버리고 새 판자로 교체한다. 배는 여전히 “그 배”다. 또 다른 판자를 교체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지나 원래 있던 모든 판자를 교체했을 경우, 그래서 처음 배를 구성했던 판자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새 판자로 모두 교체되었다면, 그래도 배는 여전히 “그 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를 대하는 마음은 테세우스의 배와 같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시를 대하는 마음을 조금씩 허물고, 동시에 그 자리에 새것을 채워 넣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대하는 마음은 항상 유동적이며 가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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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의NOAA

 

8. 후일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그 여행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습득한다. 정해진 기간 내에 어느 관광지를 갈 것이며 어느 관광지를 가지 않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무엇을 먹을 것이고 무엇을 먹지 않을지 결정해야 한다. 나보다 먼저 여행지에 방문한 사람들의 후기를 찾아볼 수 있다.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여 나만의 루트를 계획할 수 있다. 사실 이 과정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해당 관광지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더라도 직접 가보겠다는 마음이다.

직접 가보고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더 좋은 선택의 기회가 생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아야 한다. 다음 여행에 어떤 관광지를 가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 이유가 명확해야 할 것이다. 가지 않는 것과 가지 못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겪은 여행 후기와 그곳에 존재하는 관광지 몇 군데에 대한 소감을 적었다. 이 글을 읽은 분들은 내가 갔던 곳을 방문하며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고, 생각보다 만족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것을 경험해본다는 사실이다.

앞서 나는 시의 의도가 전달되지 않는 지점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언어의 특징이다. 언어로 무언가를 전달한다는 건 착각이다. 언어로 나의 후일담을 전달하는 데에 오해가 생길까 봐 많은 고민이 있었다. 부디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다. 언어로 전달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고집은 그 뜻이나 어감조차도 부정적인 뉘앙스로 많이 쓰이지만, 나는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의 고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정답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 있어서 시라는 장르는 오답은 있지만 정답은 없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고집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정답이 없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다.

시를 읽지만 음악을 거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시를 읽지만 영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시를 읽지만 회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는 다르다. 음악을 듣지만 시를 거부하는 사람은 많다. 영화를 관람하지만 시를 거부하는 사람은 많다. 회화를 감상하지만 시를 거부하는 사람은 많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라는 장르는 다른 장르에서 느낄 수 없는 감각을 향유하기 위함이 아닐까?

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시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시에서 아무리 신비를 걷어내고 걷어내도 절대로 걷어지지 않는 마지막 신비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마술이 아니라 마법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시를 마법이 아닌 마술이라고 표현했지만, 끝내 걷어지지 않는 그 신비는 마법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아마 그 지점에서 시에 매료되었을 것이고, 바로 그 지점에 “나의 목소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대단한 시인이 아니다. 그냥 시를 좋아하는,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분들과 다를 바 없는 시인이다. 나는 시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어떤 자부심 같은 게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시에 재미나 흥미를 느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같은 이유로 나는 강의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내가 경험한 재미를 더 많은 이와 공유하고 싶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게 나의 일이고 시를 쓰는 우리의 일이다.